Physics in General

Physics in Gener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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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rvey Fletcher

하비 플레처. 스테레오 사운드로 잘 알려진 물리학자다. 그리고 그의 지도교수는 로버트 밀리컨이다. 플레처는 1908년에 삼 년 동안 브링햄 영 대학교를 졸업하고 시카고로 가서 그곳에 있는 시카고대학교에 입학하고 싶었다. 하지만 시카고대학교에서는 그가 받은 교육이 충분하지 않다고 여겨 입학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그 때 그를 도와준 사람이 밀리컨이었다. 시카고대학교에 간신히 입학한 플레처는 밀리칸 밑에서 그 유명한 기름방울 실험을 했다. 플레처 전에는 물방울을 이용했지만, 금방 말라버렸다. 그래서 밀리컨, 플레처, 베게먼, 이 세 사람이 서로 의논하면서 좀 더 안정된 실험을 하기 위해서는 수은이나 기름을 쓰는 게 나을 것이라고 했는데, 플레처는 기름을 이용했다. 이 아이디어가 누구에게서 나왔는지는 말이 서로 엇갈린다. 첫 번째 실험 결과는 1910년 9월 30일 <사이언스>지에 출판되었다.
그런데 이상한 건, 이 논문의 저자 목록에는 로버트 밀리컨 이름만 나온다. 여기에는 숨겨진 이야기가 있다. 1910년 6월쯤, 밀리컨은 플레처가 아내와 이제 막 태어난 지 한 달 된 딸과 살고 있는 누추한 아파트로 찾아갔다. 거기서 밀리컨은 플레처에게 몇 가지를 제안했다. “네가 박사학위 논문에 출판된 논문을 이용하고 싶다면, 그 논문은 오직 네 이름만으로 쓴 논문이어야 한다.”
그래서 이 기름방울 실험으로 밀리컨과 플레처는 다섯 편의 논문을 썼는데, 가장 중요한 첫 번째 논문은 밀리컨의 이름만 넣고, 두 편은 플레처의 이름만 들어가고, 나머지는 두 편은 공저자로 출판되었다. 플레처는 이 흥정(?)이 불공평하다고 여겼지만, 받아 드리기로 했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이 결정은 플레처가 죽을 때까지 비밀에 부치기로 했다. 플레처는 죽기 직전에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일을 글로 남기고, 친구이자 동료였던 마크 가드너에게 ‘내가 죽거든 이 글을 출판해 달라’고 부탁했다. 밀리컨과 했던 약속을 지킨 셈이었다.
밀리컨의 이름만 들어가 있는 이 사이언스 논문은 밀리컨이 노벨물리학상을 받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플레처 입장에서 보면 참 불공평한 처사였다. 그렇다고 해서 플레처는 큰 불만이 없다고 했다. 그는 시카고대학교에 있는 동안 밀리컨에게 많은 신세를 졌고, 밀리컨 덕에 1911년 시카고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을 때 그 학교가 세워진 이래 물리학과 학생으로는 처음으로 suma cum laude의 성적을 받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평생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하지만 밀리컨이 플레처가 세운 공을 빼앗아간 건 사실이다. 밀리컨은 이후에도 우주선 연구를 할 때 헤스와 콜회르스터가 먼저 한 일을 인용하지 않았다. 요즘 같았다면, 사람들은 밀리컨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칼텍의 구드스타인 교수처럼 밀리컨을 옹호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몇몇 과학사가들은 밀리컨을 쇼비니스트에 반유대주의자, 그리고 대학원생들을 불공정하게 다룬 인물로 평가하기도 했다.

그리고 우주선에 얽힌 불공평한 일은 또 하나 있다. 이탈리아 지질학자 파시니의 업적은 거의 잊혀졌다. 밀리컨과 카메런보다 훨씬 먼저 비슷한 실험을 한 사람이지만, 그의 업적은 그 어느 책에도 나오지 않는다. 과학에서는 왜 이런 일들이 종종 일어나는 걸까? 결국 과학도 사람이 한다. 내가 책을 쓰기로 한 결심한 이유도 이런 게 많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테트라쿼크(Tetraquark)

테트라쿼크(tetraquark). 이것은 쿼크가 네 개로 이루어진 중간자를 뜻한다. 가벼운 쿼크 네 개로 구성되어 있는 중간자를 실험적으로 규명하는 것은 정말, 정말 어렵다. 그 이유는 네 개로 이루어진 입자를 쿼크와 반-쿼크만으로 이루어진 평범한 중간자와 구별하기도 어렵지만, 그 입자가 정말 테트라쿼크인지, 아니면 두 중간자가 서로 묶여 있는 분자 같이 생긴 중간자인지, 실험으로는 구분할 길이 없다. 대표적인 예를 하나 들면, 질량이 980 MeV쯤 되는 f0다. 아인슈타인 이래, 물리학자들은 질량이나 에너지를 같다고 본다. 핵자의 질량이 대략 940 MeV니까, 이 f0라는 입자는 핵자보다는 약간 더 무거운 중간자다. 중간자라는 이름은 이런 조금 무거운 중간자들이 발견 되기 전에 붙인 이름이라 이 중간자라는 이름을 이런 입자에 붙여 사용하는 것은 문제가 좀 있긴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렇게 이름 붙인 것도 우리의 역사인 걸. 어쨌든 이 입자는 케이 중간자와 반 케이 중간자로 붕괴한다. 그래서 이 입자를 K-Kbar 분자 상태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이 테트라쿼크를 구성하고 있는 쿼크 중에서 두 개가 무거운 놈들이라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2003년에 경상대 최숙경 교수와 Steve Olsen이 일본 고에너지연구소에서 최초로 별난 무거운 중간자를 발견하였다. 이 별나다는 말은 이 새로운 입자를 기존에 무거운 쿼크 하나와 무거운 반쿼크 하나로 이루어진 입자로 설명하기 힘들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쿼크와 반쿼크 외에 다른 쿼크가 두 개 더 들어가 있거나 아니면 글루온 같은 놈들이 이 입자를 구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 새로운 입자에는 X(3872)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최초로 발견된 입자 답게 다른 입자와 비교해서 성질이 제법 많이 알려져 있는 게 이 X(3872)이다.
그런데 이런 테트라쿼크 말고 무거운 쿼크가 두 개, 가벼운 반 쿼크가 두 개로 이루어진 테트라쿼크는 아직까지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무거운 쿼크가 두 개 생기려면, 무거운 반 쿼크도 반드시 두 개 생겨야 하는 법이다. 그래서 이런 입자를 만들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제법 높아야 한다. 이런 입자를 발견할 수 있는 곳이래야 LHC 밖에는 없다. 시간이 지나면, LHCb나 CMS 같은 그룹에서도 이런 입자들에 관심이 생기길 바란다.
이 무거운 반 쿼크 두 개, 가벼운 쿼크 두 개로 이루어진 중간자가 내게 특별히 흥미로운 이유는 이렇다. 가벼운 쿼크 두 개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그 성질이 무거운 중입자와 별 다를 게 없다는 말이다. 무거운 쿼크들은 정말 무겁기 때문에 하는 역할이라고는 기껏해야 색깔을 잘 맞춰 중간자가 하얀색이 되게 하는 것, 그리고 스핀들끼리 결합을 해서 서로 다른 입자들이 구별 되게 대칭성을 살짝 깨는 것 정도다. 결국 근본적인 역할은 가벼운 쿼크 두 개가 한다.

겉보기에는 많이 달라 보여도 실상은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 물리가 재미있는 이유이다. 시스템이 달라도 작동 원리는 비슷하다.

11월 혁명

11월 혁명이라는 말을 들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뭘까? 1918 년 11월 독일에서 시작된 11월 혁명 (Novemberrevolution)은 황제 국가였던 독일이 입헌군주제에서 바이마르 입헌 공화국으로 다시 태어나는 데 결정적이었던 혁명이었다. 그런데 다른 데서도 11월 혁명이 완전히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시작되었다. 1974년 11월, 스탠포드 선형가속기센터에서 버턴 리히터가 이끄는 실험 그룹과 매서추세츠공과대학의 사무엘 팅의 연구팀이 각각 부룩헤이븐 국립연구소에서 무거운 쿼크로 이루어진 입자를 발견했다. 물리학자들은 이 사건을 11월 혁명이라고 불렀다. 시인 김수영은 “혁명은 왜 고독하여야 하는 것인가”라고 피토하듯 말했지만, 이 11월 혁명은 고독하지 않았다. 두 실험 그룹이 똑같은 입자를 거의 동시에 발견했으니까 말이다.

이 입자의 이름은 이상하다. 그것도 많이 이상하다. 처음에 리히터는 이 입자에 SP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유는 스탠포드 선형가속기센터에 있던 가속기 이름이 SPEAR였기 때문이었는데, 이런 이름을 사람들이 좋아할리 만무했다. 결국 리히터는 물리학자들이 자주 하던대로 그리스 문자를 빌려와 이 입자에 이름을 붙였다. 그 이름이 psi(ψ)다. 한편 사무엘 팅(丁)은 이 입자를 J라고 불렀는데, 여기에는 여러 가지 설이 얽혀있다. 케이온을 뜻하는 K의 앞 자가 J이기 때문에 이 입자를 그렇게 불렀다는 말도 있고, 팅의 딸 이름이 진(Jeanne)이었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어떤 이들은 팅의 한자 이름 정(丁)이 J를 닮았기 때문이라고 추측하기도 했다. 문제는 두 실험 그룹이 독립적으로 거의 같은 때 이 입자를 발견하였기 때문에 이 두 이름 중 하나만을 선택하는 건 불공정하다고 여겼다. 과학에서 어떤 새로운 사실이 발견될 때, 누가 먼저 발견했는지 우선권을 주는 건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과학에서도 역사가 늘 공정했던 건 아니지만, 적어도 이 새로 발견된 입자에 대해서만큼은 지나치리만큼 공정했다. 그래서 이 입자엔 사주팔자 고려 없이J/ ψ이라는 이름이 주어졌다.

이 J/ ψ는 맵시쿼크라고 부르는 쿼크 c와 그 쿼크와 꼭 반대되는 반쿼크 c-bar로 이루어져 있다. 혁명이라는 무지막지한 단어를 붙일만큼 이 입자의 발견은 중요했다. 1970년대 초반은, 자연에 존재하는 네 가지 힘 중에서 물질을 이루는 데 결정적인 힘인 강력의 진짜 모습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할 때였다. 60년대는 입자들의 민주주의를 부르짖던 S-행렬파들이 양자장론파들을 무자비하게 압제할 때였다. 강력이 무엇인지 안다고 생각했지만, 실상을 들여다 보면, 1960년대는 강력이 무언지 겨우 커튼을 살짝 들춰 본 정도였다. 1970년대가 되면서 상황은 역전되었다. 오늘날 강력을 설명하는 근본이론이라고 믿고 있는 양자색소역학이 비로소 탄생하였는데, 그 이론이 탄력을 받은 건 윌첵, 그로스, 폴리처가 양자색소역학에는 점근 자유도(asymptotic freedom)이 있다는 걸 증명하였기 때문이다. 늘 그렇듯이, 물리학에서 뭘 증명했다고 해서 바로 그 이론을 받아들이는 법은 없다. 이 점근 자유도 때문에 강력을 이해하기 위하여 비로소 계산 다운 계산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고, 실험적으로 이 계산 결과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세 사람에게 2004년이 되어서야 노벨물리학상이 주어진 것만 봐도, 이 강력을 설명하는 양자색소역학이 제대로 된 이론이라는 게 받아들여지는 데 얼마나 지난한 세월이 뒤에 감줘져 있었는지 알 수 있다.

1970년 전까지만 해도 쿼크는 세 종류였다. 물론 그 때는 이 쿼크를 실재하는 입자라고 믿는 사람은 아주 적은 수였다. 1970년에 글래쇼, 일리오폴로스, 마이아니가 입자들의 붕괴하는 걸 보고 어쩌면 네 번째 쿼크가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제법 그럴싸하게 예측했다. 거기에 더해 이 세 사람의 이론에는 그 분들 이름 앞 자를 따서 GIM 메커니즘(mechanism)이라는 말이 붙어 있다. 하지만 이 네 번째 입자는 쿼크 모형이 나온지 얼마 되지 않았던 1964년에 제임스 뷔요르켄과 셸던 글래쇼가 제안한 적이 있었다(좀 벗어나는 이야기지만, 난 왜 제임스 뷔요르켄이 노벨물리학상을 못 받았는지 조금은 의문이다). 1974년 11월에 발견한 게 바로 이 네 번째 쿼크였다. 질량으로 치면 제일 가볍다는 위쿼크(up quark)보다 한 200배 넘게 무거운 셈이고, 기묘하기 짝이 없다는 기묘쿼크(strange quark)보다도 10여배 가웃 무겁다.

1974년 11월 혁명 이후, 세상은 얼마나 변했을까? J/ ψ의 수많은 형제들이 태어났고, 그보다 훨씬 더 무거운 바닥쿼크(bottom quark)로 된 쿼코니움들도 발견되었으니 우리는 참 많은 걸 알게 된 셈이다. 더 재미있는 사실이 여럿 있는데, 하나는 J/ ψ에 대응되는 웁실론이라는 (b-bbar)입자의 동생 eta-b(이타-비)가 발견된 게 십 년 전도 채 안 된 2008 년의 일이다. 그 뿐인가, 쿼크가 네 개로 이루어졌다는 사중쿼크(tetraquark)가 2000년대 초반부터 지금까지 거의 매 달 툭툭 쏟아져 나온다(이 무거운 테트라쿼크는 경상대 최수경 교수가 대전 IBS에 계신 스티븐 올센 교수와 같이 일본 고에너지 연구소에서 가장 먼저 발견했다. 이런 건 널리 알려야 한다).

형태인자

어떤 입자의 생김새가 어떤 지 알 수 있는 좋은 방법은 그 입자의 형태인자라는 양을 공부하는 겁니다. 형태인자(form factor)라는 말은 말 그대로 그 입자의 형태를 보여주는 양입니다. 이 형태인자는 양자역학에서 나오는 파동함수의 절대값의 제곱과 상관 있는데, 이 파동함수의 절대값의 제곱은 어느 특정한 위치에서 입자가 발견될 확률밀도를 나타낸다는 건 양자역학을 조금 공부하면, 알 수 있지요. 굳이 이런 말을 하지 않고 좀 더 쉬운 말로 말하면, 이 형태인자는 그 속에 이루고 있는 입자들이 어떻게 분포되어 있는지 잘 보여주는 양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형태인자의 종류는 참 많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게 전자기 형태인자입니다. 형태인자 앞에 “전자기”라는 말이 붙은 건 내가 관심 있는 입자의 전자기 성질이 궁금하다는 겁니다. 전자기학에는 두 가지 원천이 나옵니다. 여기서 원천이라는 말은 그 원천이 있어야 무언가 발생되어 나온다는 걸 뜻합니다. 그러니까 전자기학에서 원천은 전하와 전류입니다. 전하는 전기장의 원천이라고 생각할 수 있고, 전류는 자기장의 원천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특수상대성이론 아래에서는 이야기가 조금 더 복잡해질 수 있습니다만, 여기서는 전하와 전류를 이 정도로만 이해하면 됩니다. 전자기 형태인자는 다시 전기 형태인자와 자기 형태인자로 나뉩니다. 물론 이 형태인자를 어떻게 나눌 것인가 하는 것도 그렇게 단순한 문제는 아닙니다만, 낮은 에너지에서는 전통적으로 전기 형태인자와 자기 형태 인자를 나눠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전기 형태인자는 입자 속에 전하가 어떻게 분포되어 있는지 알려주는 양이고, 자기 형태인자는 말 그대로 자기모멘트와 그 안에 전류가 어떻게 분포되어 있는지를 간접적으로 보여 줍니다.
무거운 중입자의 전자기 형태인자를 안다는 것은 그 안에 쿼크들이 어떻게 분포되어 있는지 안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무거운 중입자는 독특합니다. 여기서 “무거운”이라는 말을 풀어서 나타내 보면, 무거운 중입자 안에는 가벼운 쿼크 말고 무거운 쿼크도 하나 들어있다는 말입니다. 물론 무거운 쿼크가 두 개 있고, 가벼운 쿼크는 하나만 있는 중입자도 있습니다. 이런 중입자를 “이중으로 무거운 중입자(doubly heavy baryon)이라고 부르는데, 최근에야 이 중에 두 개가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 개 사이의 질량 차이가 하도 이상해서 그 실험 중에 하나는 아마도 틀리지 않았을까 의심하고 있지요.
제가 최근에 연구한 건 무거운 쿼크 하나만 들어 있는 중입자의 전자기 형태인자입니다. 조금 전에 이야기했지만, 이 안에는 무거운 쿼크가 하나 들어 있습니다. 마치 터줏대감 마냥 무거운 중입자 안에 떡, 하니 버티고 있지만 실상은 이 무거운 쿼크에게는 아무런 권력이 없습니다. 그저 무거울 뿐이지요. 그 안에서 요란하게 떠들고 다니는 건 가벼운 쿼크 두 개입니다. 결국 무거운 쿼크 속에 전하가 어떻게 분포되어 있는지 알려주는 건 가벼운 쿼크입니다.
이 무거운 중입자의 형태 인자를 보면, 가벼운 쿼크가 “한 번 볼래? 나는 무거운 중입자 안에서 이렇게 살고 있어!”라고 외치는 듯 하지요. 자기 형태인자에서 무거운 쿼크는 그야말로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하지만, 전기 형태인자에서는 자기도 전하는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 무거운 중입자도 한 두 마디는 합니다. 무거운 쿼크에는 두 종류가 있어요. 아니, 실은 세 종류이지만, 톱 쿼크(top quark)라고 하는 녀석은 너무 무겁기도 하고, 생겼다가 금방 사라지기 때문에 채 입자를 만들 여유가 없어요. 그래서 중입자에서 무거운 쿼크라고 하면, 맵시 쿼크(charm quark)와 바닥 쿼크(bottom quark)만을 의미합니다. 지금 봐도 맵시 쿼크의 이름은 참 예쁘게도 지었습니다. 그렇다고 정말 맵시 넘치는 건 아닙니다. 이 둘 중에서 오히려 다루기 편한 건 바닥 쿼크에요. 왜냐하면 맵시 쿼크보다 더 무겁기 때문이죠. 무거우면 왜 다루기 쉽냐면, 더 무거워서 확실히 ‘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이 둘에게는 질량 말고도 차이 나는 점이 있습니다. 그게 전하인데, 맵시쿼크의 전하는 전자의 전하보다 2/3 정도, 바닥 쿼크는 1/3정도 되는 전하를 띠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닥쿼크의 전하는 음전하이고, 맵시 쿼크의 건 양전하지요. 전기형태인자를 계산할 땐 이 무거운 쿼크의 전하도 생각해줘야 하는데, 이 두 쿼크의 질량이 무한대로 무겁다고 가정하면(이론물리학자에게 적당한 가정은 필수입니다), 이 무거운 쿼크는 아무런 구조가 없는 작은 입자라고 취급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형태인자에는 가벼운 쿼크가 이루고 있는 모습에 그저 이 전하만 더해 주면 됩니다.
이 무거운 쿼크 때문에 무거운 중입자의 크기는 확실히 핵자나 하이퍼론(가벼운 중입자)보다 작습니다. 이게 조금은 미스터리에요. 보통 뚱뚱한 사람이 가벼운 사람보다 더 큰데 반해, 입자들의 세계에서는 이렇게 무거운 녀석들의 크기가 더 작아요.
이번에는 무거운 중입자 중에서 스핀이 1/2인 녀석들의 형태인자만 연구했지만, 곧 스핀이 3/2인 아이들의 모습도 그려볼 겁니다. 그리고 나서는 이 스핀이 3/2인 녀석이 1/2로 바뀌는 걸 보여주는 형태인자도 계산할 텐데, 이런 형태인자는 무거운 중입자들이 동그랗게 생겼을까, 아니면 살짝 찌그러져 있을까를 보여주기 때문에 또 다른 재미가 있지요.

파시니를 기억하며

과학역사의 제0 정리(The zeroth theorem of science history)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피셔라는 독일 역사학자가 한 말이라지만, 이 말을 물리에 적용한 사람은 전자기학 교과서로도 유명한 입자 이론물리학자 잭슨(J.D. Jackson)이다. 잭슨은 마이클 베리가 한 “세상에 가장 먼저 발견된 건 없다”는 말로 과학역사의 제영 정리를 정의했다. 물리학이나 수학에는 물리학자의 이름이 붙은 방정식과 정리가 제법 많이 나온다. 식에 이름을 붙이는 이유는 구분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그 사람의 업적을 기리는 면도 있기 때문에, 이왕 이름을 붙이려면 제대로 붙이는 게 좋다. 그런데, 역사가 늘 공정한 건 아니다. 물리학에서 이런 불공평한 예가 제법 많지만, 그 중 하나가 Lorenz gauge(로렌쯔 게이지)다. 이건 원래 전자기학에서 나오는 벡터 퍼텐셜에 군더더기가 있는 걸 고정시킬 때 쓰는 여러 방법 중 하나인데, 워낙 Hendrik Lorentz의 명성이 높고 그가 고전 전자기학에 남긴 업적이 커서 원래 이 게이지를 제안한 Lorenz 대신에 이 분 이름이 붙여졌다. 전자기학 교과서나 양자장론 교과서 대부분을 보면 이 게이지를 Lorentz 게이지라고 부른다. 그저 t가 하나 더 들어갔을 뿐이라고 하기엔 Lorenz 입장에서 보면 좀 억울할 거다. 이 게이지를 가장 먼저 말한 사람은 Lorenz다. 잭슨이 예로 들듯, 맥스웰방정식도, 디랙의 델타함수도, 그 이름에 약간의 불공정함이 깃들어 있다.


과학역사의 제영 정리를 말한 건 오늘 잊혀진 물리학자 한 명을 다시 세상으로 끄집어 내기 위해서다. 이탈리아 물리학자 도메니코 파시니(Domenico Pacini). 구글에서 Pacini라고 치면 이 사람 이름이 안 나온다. Domenico Pacini라고 쳐야 딱 세 줄로 그를 소개하는 글이 나온다. 숨겨진 이 사람을 다시 찾아낸 데는 같은 나라 사람인 Angelis라는 물리학자의 힘이 컸다. 1902년에 로마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한 파시니는 로마에 있는 기상학과 지질역학 사무국에서 일하면서 호수에서, 바다에서 우주선(그 때는 방사선)을 측정한 사람이다. 1907년부터 1912년까지 우주선 실험을 했으니까, 우주선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벡터 헤스의 연구보다 조금 앞 섰던 셈이다. 1912년 2월에 이탈리아 물리학회지인 누오보 시멘토(Nuovo Cimento)에 실린 그의 논문 초록을 보면 깜짝 놀랄만한 결론이 적혀 있다. 바다 속에서 방사선의 양이 줄어드는 이유로 이 방사선의 원인이 지구 표면 암석과는 상관 없다고 파시니는 결론을 내렸다. 이 실험은 14년이 훌쩍 지난, 1926년에 미국의 밀리컨이 조수가 한 것과 똑 같은 실험인 셈이었다. 밀리컨은 자기가 얻은 실험 결과로 우주선은 지구 표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주에서 온다고 결론 내렸다. 그러면서 “우주선은 우리 은하에서 원자가 태어나며 부르짖는 탄생의 소리!”라는 말로 정리했다. 그러나 파시니의 연구는 모든 사람에게 잊혀졌다. 빅터 헤스는 밀리컨이 고의로 자기와 콜회르스터의 실험을 인용하지 않았다고 불평을 터뜨렸지만, 파시니는 헤스에게 편지를 보내 자기가 한 일이 헤스가 한 일보다 빨랐다고 항변했다. 헤스는 사과했지만, 엎질러진 물을 다시 담는 건 논문 인용에서도 적용되는 말이다.


비극은 헤스가 노벨상을 받던 1936년에 파시니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1934년에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헤스에게 노벨물리학상을 주었던 위원회에 우주선에 대한 보고서가 제출되었는데, 거기서는 파시니의 업적을 잠깐 이야기했지만, 우주선을 발견한 공로는 헤스에게로 돌아갔다. 1950년대부터 지금까지 나온 우주선 관련 교과서들에서 파시니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모든 물리학자가 그를 몰랐던 건 아니다. 페르미의 제자였던 에도아르도 아말디(Edoardo Amaldi)라는 물리학자가 있다. 그는 유럽 가속기 연구소인 CERN이 세워졌을 때 초대 소장을 지내기도 했던 훌륭한 실험물리학자다. 1941년에 이탈리아에도 파시즘이 기승을 부리고 있었는데, 때로 이런 광기는 과학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 해 Il Tevere라는 지역 신문에 “우주선 연구는 유대인의 연구”라며 혹평 하는 얼토당토 않는 글이 실렸을 때 아말디는 용감하게 그 신문사에 편지를 보낸다. 그 편지 중에 “우주선을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은 이탈리아 물리학자 파시니”였다는 말이 나온다. 그러면 파시니는 왜 잊혀 졌을까?


1900년대 초반만 해도 학자들 사이에 서신 교환이나 지역 언어로 쓰여진 논문들을 서로 교환해 읽는 건 지금처럼 쉽지 않았다. 그리고 사무국 일로 바빴던 파시니는 학회에 참석한다거나, 다른 물리학자들과 토론한다거나 하는 짬을 낼 틈이 없었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 1차세계대전으로 유럽을 휩쓸던 국가주의가 있었다. 이 국가주의가 누그러진 건 정말이지 한참 지나서였다. 1900년대 초반의 과학이 이 국가주의 때문에 얼마나 얼룩졌는지 살펴본 연구들도 있다. 결국 과학도 사람이 한다. 과학자들의 공명심과 이기심, 그리고 그 반대되는 이타심에 대해서야 이야기를 풀어 놓으면 한도 끝도 없겠지만, 오늘은 이탈리아 물리학자 파시니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역사의 뒤안길은 슬프다. 역사란 대부분 이름 있는 자들을 기억하길 좋아한다. 그러나 때로는 역사 뒤를 한번씩 쳐다봐야만 한다. 잊혀진 자들 말이다. 그건 과학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웁실론(Ulsilon)

윤천실 교수님께서 올려 놓으신 신문 스크랩을 보다가 떠오른 생각이다. 웁실론(Upsilon)은 1977년에 페르미연구소에서 발견하였는데, 이 웁실론은 바닥쿼크 하나와 반 바닥쿼크 하나로 되어 있다. 이 웁실론처럼 무거운 쿼크와 반물질인 반 쿼크의 쌍으로 만들어진 중간자를 총칭해서 쿼코니움(quarkonium)이라고 부른다. 이 웁실론을 이루는 쿼크와 반쿼크의 스핀이 서로 나란하기 때문에 이 웁실론의 스핀은 1이 된다. 스핀이 1인 입자를 물리학에서는 벡터 입자라고 부르기 때문에 웁실론은 벡터중간자다. 이 웁실론의 질량은 대략 9.5 기가 전자볼트, 그러니까 양성자보다 대략 열 배 정도 더 무겁고, 전자보다는 2만배 정도 더 무겁다.
그런데, 이 웁실론보다 질량이 조금 작고 쿼크와 반쿼크의 스핀이 서로 반대인 입자 이타-b(eta-b)는 비교적 최근에 발견되었다. 2008년 스탠퍼드 가속기 연구소에 있는 바바(BaBar) 연구그룹에서 제일 먼저 발견했는데, 이 이타-b가 바닥쿼크와 반 바닥쿼크로 이루어진 입자 중에서는 질량이 제일 작다. 웁실론이 발견된 지 30년이 훌쩍 넘어서야 발견되었으니 이 이타-b를 찾는 게 실험적으로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나 보다. 그리고 보통은 질량이 제일 작은 입자가 먼저 발견되는데 반해, 쿼코니아의 경우에는 벡터 입자가 항상 먼저 발견되었다. 웁실론도 그렇고, 맵시쿼크와 반쿼크로 이루어진 J-싸이(J/Psi)도 그렇고. 그 이유는 둘 다 이타-b나 이타-c보다 훨씬 더 날씬하기 때문이라고 해도 될 것 같다.
LHC에서도 바닥쿼크로 만들어진 쿼코니아들 중 웁실론보다 질량이 큰 들뜬 녀석들이 이제야 하나둘씩 발견되니까, 웁실론이 발견된 지 거의 사십 년이 지나서야 바닥쿼크를 좀 더 잘 알 수 있게 된 셈이다. 그러니까, 아직도 할 일은 많이 남아 있다.

중입자 2

물리에서 아주 유용하게 쓰이는 개념 중에 평균장 이론이라는 게 있다. 제법 많은 입자들이 오글오글 몰려 있을 때 이 입자들끼리 쑥덕거리는 걸 다 고려한다는 건 정말 어렵다. 특히나 입자수가 정말 많을 때, 이 입자들이 서로 쳐다보고 주고 받는 말을 다 적는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물리학자들은 평균장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는데, 이게 요상하게도 잘 맞는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어딘가 잘 안 맞는 구석이 있긴 하지만, 거꾸로 말하면 어딘가 잘 맞는 구석이 있다고도 말할 수 있기 때문에 이 평균장 이론은 물리학의 여러 분야에서 많이 쓰인다. 그래서 이론물리학자들이 복잡한 계를 이해하는 데 첫 번째 도구로 쓰는 것이 이 평균장 이론이다. 이 평균장 이론을 쉽게 표현하면, 많은 입자들이 서로 주고 받는 말을 단 한 두 마디로 정리하는 것이다. 이렇게 정리하면, 많은 입자 하나하나를 다룰 필요가 없고, 그 중 대표되는 녀석 하나가 이 평균장 안에서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보면 된다. 이걸 조금 유식한 말로 다체계를 단일 입자계로 바꾸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조금 더 유식한 말로 표현하자면, 입자들 사이에 일어나는 양자요동은 무시하자는 말로도 표현할 수 있지만, 이건 좀 어려운 표현이니까 뒤로 제쳐 두자.
핵물리학에서 아주 성공적이었던 핵껍질 모형 (Nuclear shell model)이라는 게 있다. 이 모형은 워낙 성공적이었기 때문에 이 모형을 제안한 마이어(Maria Goeppert Mayer)와 옌젠(J. Hans D. Jensen)이 1963년에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이 핵껍질 모형도 일종의 평균장 모형이다. 핵 안에는 양성자와 중성자들이 오글오글 몰려 살고 있지만, 이 녀석들이 만드는 평균장 아래 그 중에 대표되는 핵자가 어떤 영향을 받는지에 바탕을 둔 모형이 이 핵껍질 모형이다. 핵자도 비슷한 방법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리고 좀 더 나아가 바리온(핵자도 바리온에 속한다)도 이 평균장 모형으로 이해할 수 있다. 바리온을 평균장 이론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탄탄한 이론적인 뒷 배경이 필요한데, 이걸 제안한 사람이 앞 선 글에서 말했던 에드워드 위튼이다. 물론 위튼 전에도 바리온을 설명하기 위해서 여러 퍼텐셜 모형이 제안되었는데, 이런 퍼텐셜 모형도 일종의 평균장 모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조금 문제가 있다. 수학적으로 말하면 바리온을 설명하는 대부분의 모형에서 차용하는 대칭성이 SU(6)XO(3) 대칭성(좀 끔찍해 보이지만, 그저 이 대칭성을 에스유 식스 타임즈 오 쓰리 대칭성이라는 이름으로만 여기자)이다. 문제는 이 놈의 대칭성이 너무 많은 핵자와 하이퍼론을 내놓는다는 거다. 실험에서 발견되는 건 그리 많지 않은데, 이 대칭성의 크기가 워낙 커서 나오는 바리온의 수가 너무 많다. 강입자물리학에서는 이 문제에 거창한 이름을 달아 놓았다.
빠져있는 공명 입자 문제(missing resonance problem). 이건 아직도 미해결 문제다(실은 해결책이 없는 건 아니다). 그리고 또 하나, 대부분의 쿼크 모형에서 반전성이 양인 첫 번째 들뜬 핵자의 질량이 1.5 기가볼트를 훌쩍 뛰어 넘어 거의 2 기가볼트에 가 있다는 것이다. 이 첫 번째 들뜬 핵자에는 로퍼 공명 입자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데, 격자게이지 이론조차도 이 로퍼 공명 입자의 질량이 반전성이 음인 핵자의 질량 1.535기가볼트보다 작게 나오는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그러니까 허걱! 인 셈이다. 무엇이 문제일까? 실은… 나도 정확하게는 잘 모르지만, 그 비밀은 양자색소역학의 어려운 문제인 쿼크 갇힘 문제에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 추측이다. 들뜬 바리온은 발견된 지 육십 년이 훌쩍 지났지만, 여전히 난제다. 그래서 조금 쉬운 문제부터 시작하자. 그러니까 핵자와 바리온 중에서 질량이 가벼운 바닥 상태의 하이퍼론부터 출발해보자.
위튼은 핵자의 질량은 색깔수 N에 비례하고, 그 크기는 N과는 상관 없다고 했다. 그러니까 핵자 안에 있는 쿼크가 색깔수 만큼 있다고 가정하고, 이 N을 무한대로 보내면 다체계인 셈이다. 그리고 이걸 평균장으로 근사를 취하면, 쿼크 하나만 다루면 되니까 문제가 아주 쉬워진다. 위튼은 1970년 논문에서 2차원 양자색소역학을 이용해서 이 평균장 이론을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이 설명하는 과정에 경로적분(path integral 또는 functional integral)이라는 방법을 사용하였는데, 이 방법이 오늘날 이론물리학자들이 흔히 쓰는 방법이라고만 일러 두자. 위튼은 여기에 쿼크 네 개가 서로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는, 그럴듯한 상호작용을 제안했는데, 이 네 개의 쿼크가 서로 이야기를 주고 받는 걸 표현한 모형이 물리학에서 잘 알려진 남부-조나-라지뇨 모형이다. 그런데, 한발 더 깊이 들어가면, 4차원 양자색소역학에서 출발해서 인스탄톤을 이용하면, 쿼크의 맛깔수가 2일 때는 네 개의 쿼크가, 3 일때는 여섯 개의 쿼크가 모여 쑥덕 되고 있다고 표현할 수 있다. 그래서 마치 위튼이 2차원에서 한 걸 4차원에서 하면, 제법 괜찮은 모형을 만들 수 있다. 그 모형이 내가 지난 25년 동안 갈고 닦으며 만들어온 손지기 쿼크-솔리톤 모형(chiral quark-soliton model)이다.
최근에 이 모형을 무거운 바리온에다 한 번 써 봤는데 기가 막히게 잘 맞아 들어간다. 여기서 커다란 장점은 아무런 자유 매개변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 자유 매개변수가 없다는 말은 물리학에 아주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론적으로 제법 제대로 된 모형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고, 계산하면서 내가 이래저래 해볼 수 있는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말이다. 가벼운 바리온을 설명하면서 결정한 동역학적 변수들을 그대로 가져와서 무거운 바리온을 설명하면 되니까 말이다. 이 무거운 바리온은 오히려 가벼운 바리온보다 다루기가 수월하다. 그 이유는 그 안에 있는 쿼크 중 한 녀석이 비만도 이만저만 비만이 아니라서 움직이길 싫어하기 때문이다.

한동안 페북에서 오메가 씨 이야기를 좀 했다. 이 모형에서 주장하는 건 LHCb실험에서 발견한 이 오메가 씨가 흔히 알고 있는 전하가 중성인 그런 오메가 씨가 아니라 양의 전하나 음의 전하를 가질 수도 있다는 거였다. 만약에 말이다, 정말 만약에 Belle이나 LHCb에서 음의 전하를 갖는 오메가 씨나 양의 전하를 갖는 오메가 씨를 발견하면, 이 모형의 진가가 제대로 드러날 것이다. 단언하건대 이 주장을 한 논문의 피인용수가 천 번 넘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역으로 그런 입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론물리학이 좋은 게 뭐냐면…… 그저 이렇게 한 마디 하면 된다. 아니면, 말고. 좀 무책임하지만…

중입자(Baryon)

중입자. 영어로는 바리온(Baryon)이라고 부른다. 그리스어로 무겁다는 뜻인 바루스(βαρύς)에서 왔다. 성경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에 나오는 “무거운”이 바로 이 바루스다. 바리온은 핵자(양성자와 중성자)와 하이퍼론을 통칭하는 말이다. 이 이름은 1954년 교토에서 열린 이론물리학회에서 아브라함 파이스가 가장 먼저 언급했던 것 같다. 1950년대 당시 발견 되던 중간자들보다 질량이 무거웠기 때문에 바리온이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오늘날에는 핵자나 하이퍼론보다 무거운 중간자가 많으니까, 무겁다는 이름은 감추고 그저 이름으로써 바리온만 남았다고 보면 된다.
이번 일본 방문 동안, 두 번의 강의를 했는데, 이 두 번째 강의 주제가 바리온이다. 바리온의 구조는 어렵다. 이 중에서 간단한 녀석들은 단지 쿼크 세 개로 이뤄져있을 뿐이지만, 그 속을 살피는 건 정말 어렵다. 이 바리온을 이론적으로 이해하는 아주 훌륭한 방법을 에드워드 위튼이 1979년에 제안했다. 에드워드 위튼이 초끈 이론만 했다고 생각하지 마시라. 초끈 이론의 대가 중에는 젊은 날, 현상론에도 눈이 밝았던 사람들이 제법 있다. 그 중에 한 명이 에드워드 위튼이다. 에드워드 위튼의 초기 업적은 하이퍼론의 비렙톤적 붕괴 같이 실험적으로 아주 밀접한 주제와 관련 있다.

1979년에 위튼은 “1/N 전개에서 바리온 (Baryons in the 1/N expansion)”이라는 제목으로 논문을 한 편 낸다. 이 논문은 1974년에 엇후푸트가 중간자를 설명하면서 이용한 방법을 바리온에 적용한 논문인데, 위튼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하나씩 살펴보자. 여기서 N은 쿼크의 색소수를 의미한다. 쿼크는 전자와 달리 세 가지 다른 전하 중 하나를 지닐 수 있는데, 물리학자들은 이 서로 다른 세 가지 전하에 “빨강”, “초록”, “파랑”이라는 이름을 붙여 놓았다. 파인만은 이렇게 이름 붙이는 걸 참 싫어했지만, 어쩌랴, 결국 이 세 전하 이름에 이렇게 예쁜 색깔 이름이 붙어진 걸 물리학자들이 쓰기 시작해 버린 걸. 이 세 가지 색깔을 붙여 놓은 데는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쿼크는 맨 눈으로는 볼 수 없고, 오직 중간자나 바리온만 볼 수 있다. 물리학자들은 이렇게 볼 수 있는 입자에는 색깔을 써서 색소양자수가 하얀색이라고 불렀다. 그러니까 세 가지 다른 색깔을 가진 쿼크를 합쳐 놓으면 하얀색의 바리온이 된다는 의미로 이렇게 색깔을 분류하였으니까 그다지 나쁜 시도는 아니었다. 언어라는 게 1차 의미에서 파생되어 2차, 3차로 추상적인 의미로 진화하기도 하니까, 이 색깔에 물리적으로 좀 더 풍부한 의미를 담았다고 보면 된다.

실험물리학자에 비해 이론물리학자가 가진 기술이라는 건 조금 초라하다 이론물리학자란, “내게 전개계수를 달라, 그러면 내가 그대에게 답을 주리라”는 말로 정의한다고 해도 크게 화낼 이론물리학자는 없을 것이다. 이렇게 전개계수를 이용해서 첫 번쨰 항, 두 번째 항을 차례대로 계산해가는 걸 물리학에서는 섭동이론 또는 건드림 이론이라고 부른다. 이론물리학에서 이 건드림 이론 외에 제대로 된 방법은 그다지 많지 않다. 그런데 강상호작용에서 에너지가 낮은 경우에는 전개계수로 이용할만 한 것이 마뜩치 않다. 쿼크와 글루온들 사이의 결합상수는 에너지가 클 때는 그 값이 작아지기 때문에 전개계수로 쓰는 데 문제가 없지만, 에너지가 낮아지면, 이 값이 커지기 때문에 건드림 이론을 쓸 수 없다. 그런데 엇후푸트가 찾아낸 전개계수가 하나 있었는데, 그게 색깔수 N이었다. 세 개의 다른 색깔이 있으니까 실제로 이 N은 3이지만, 엇후푸트는 이 N이 무한히 커질 경우를 생각했다. 알고 보면 기가 막힌 아이디어였다. 숨어 있는 전개계수를 찾아낸 셈이니까 말이다.

위튼은 이 N이 무한히 커질 때 바리온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지 여러 각도에서 깊이 있게 따져 봤다. 위튼이 쓴 이 논문은 내가 석사학생 때, 박사학생 때, 그리고 연구원이었을 때 각각 다른 시간에 여러 번 읽었지만 그 때마다 와 닿는 게 달랐다. 그런데 강의 준비를 하면서 다시 이 논문을 찬찬히 읽었는데, 정말 대단한 논문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었다. 콜먼은 이 논문에서 위튼이 주장한 하트리(Hartree) 방법이 거의 재앙 수준이었다고 말했다지만(Manohar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 이 속에 제대로 된 답이 있다.

1983년에 제법 오랫 동안 이 위튼의 방법을 극히 단순화해서 적용한 모형이 나왔는데, 그 이름이 스컴 모형이다. 여기서 스컴(Skyrme)은 1950년대부터 60년대까지 독창적인 연구를 한 영국의 이론물리학자였지만, 안타깝게도 학계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 스컴이 한 연구를 다시 부활 시킨 사람이 위튼이다. 위튼의 놀라운 수학적 능력으로 이 빈사 상태였던 스컴 모형에 새 숨을 불어넣었으니, 이론물리학의 대제사장으로 위튼의 능력은 우러러 볼 수 밖에 없다. 이 스컴 모형은 2000년대 들어 말다세나(Maldacena)가 주장한 반-드시터-등각장론추측(anti-de Sitter-Conformal field theory)에 기운을 받아 한동안 세간의 주목을 다시 받고 있다. 하지만 쿼크의 관점에서 보면 이 스컴 모형은 대단히 단순화된 핵자의 평균장 모형이라고 봐야만 한다.

위튼이 쓴 1979년 논문을 꼼꼼히 살펴보면, 위튼은 2차원 양자색소역학에서 어떻게 바리온을 설명할 수 있는지 설명하는데, 이 부분이 지금까지 내가 놓치고 있었던 부분이었다. 2차원이라서 4차원에 살고 있는 우리와 상관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게 아니다. 위튼은 정말 잘 알고 있었다, 위튼은 평균장 이론을 넘어 바리온에 중간자의 양자요동까지 고려할 수 있는 방법까지 제안했다. 물론 2차원 양자색소역학이고, 위튼 논문이 늘 그렇듯이 아라비아 숫자가 나오지 않지만, 그의 아이디어 만큼은 놀랍다는 말 밖엔 할 말이 없다.

양자역학 단상

19세기말, 물리학자들이 고민을 한 가지씩 이었겠지만, 대부분 큰 문제들은 해결되었다고 믿는 분위기가 팽배했던 건 사실이었다. 디랙이 처음에 물리학이 아니라 전기공학을 전공하게 된 것도 그런 연유 때문일 것이고. 하지만 몇 가지 심각한 문제를 인지한 물리학자들도 제법 있었다. 원자의 안정성 문제, 흑체복사, 광전효과, 원자의 비열 문제......


네빌 프랜시스 모트도 "양자역학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라는 논문에서도 지적했지만, 양자역학이 왜 그 어려운 흑체복사를 끼고 태어났을까? 일반물리학에서 배우는 기체의 탄성이론을 배울 때, 기체분자들의 충돌을 탄성충돌로 가정하는데, 온도가 실온 정도에서는 이 가정이 잘 맞는다. 하지만 온도를 좀 올리면(용광로 정도로) 기체들은 더 이상 탄성충돌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충돌할 때 얻은 운동에너지를 그 분자의 에너지 레벨을 올리는 데 쓰기 때문에 그 에너지만큼 흡수한다. 그러니까 이 기체이론을 조금 더 심각하게 살폈더라면, 굳이 흑체복사를 거치지 않고서도 양자역학이 태어났을지도 모른다는 게 모트의 생각이다.


하지만 역사는 물리학에서도 아이러니하다. 역사는 흑체복사를 선택했다. 그런데 이걸 이해하려면 전자기학도 잘 알아야 하고, 열통계역학도 잘 이해하고 있어야만 한다. 흑체복사를 설명하려고 진지한 시도를 한 사람 중에 레일리도 있었다. 레일리는 흑체 안에서 전자기파를 설명하는 파동방정식을 푼 다음, 에너지 등분배 법칙을 적용하였다. 그러니까 진동수가 다른 전자기파들이 나눠 갖는 에너지가 같다고 가정했다. 레일리는 진동수가 다른 전자기파를 구분하기 위해 도입한 모드(mode) 수를 합할 때 그 수가 양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었나 보다. 모드수를 나타내는 공간에서 그 값이 양인 곳만 고려해야 하는데, 그걸 잊었다. 나중에 진즈가 레일리 공식에서 1/8이 빠졌다는 걸 발견했다. 그래서 이 흑체복사를 설명하는 고전이론에 레일리-진즈 이론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다. 이 레일리-진즈 이론은 전자기파의 진동수가 커지면 커질수록 에너지 분포가 발산한다. 여기에 물리학자들은 자외선 파탄 또는 카타스트로피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여 놓았다.


무엇이 잘못된 걸까? 이 문제를 해결한 사람이 바로 양자역학의 탄생을 알린 전령, 막스 플랑크였다. 막스 플랑크도 처음에는 빈(Wien)의 공식과 레일리-진즈 공식을 적당히 맞춰서 실험값을 설명하려는 시도를 했다. 이 첫 시도는 마치 소가 뒷걸음치다가 쥐를 밟아 잡는 격이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막스 플랑크는 자신의 공식을 제대로 구해냈다. 여기서 결정적인 건, 흑체복사에서 에너지 등분배가 틀렸다는 사실, 그리고 에너지는 진동수에 비례한다는 걸 알아낸 것이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흑체복사를 설명한 플랑크 이론을 고체의 비열에 적용하면, 온도가 많이 낮아질 때 비열이 더 이상 상수가 아니라 점점 작아진다는 사실을 잘 설명할 수 있다.


원자의 안정성 문제, 흑체복사, 광전효과, 원자의 비열이 가리키는 곳은 똑같다. 플랑크 상수 h다. 이 플랑크 상수에 담긴 뜻은 오묘하기 이를 데 없다. h 너머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없다는 사실, 하이젠베르크가 닐스 보어와 치열한 논쟁을 한 뒤, 세상에 내놓은 불확정성 원리가 우리에게 외친다. "이걸 넘어서는 더 이상 알려 하지 말라고"


물리학에 넘사벽이 둘 있는데, 하나는 빛의 속도 이상 달리지 말라는 속도제한이고, 다른 하나는 이걸 넘어서는 너희들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알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알려주는 플랑크 상수다. 어쩌면 이 너머에 좀 더 심오한 진리가 숨어있을지는 모를 일이다.


지나친 낙관주의는 금물이다. 양자역학은 19세기말까지 이뤄 놓은 물리학을 뿌리부터 뒤흔들어 놓았다. 조금은 뜬금 없는 소리지만, 내가 포퍼가 주창한 비판적 합리주의를 좋아하는 이유도 이런 이유다. 내가 틀릴 수 있다는 걸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비판적 합리주의는 허약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정직하다. 학문에서 이보다 더 중요한 게 있을까? 19세기말에 많은 물리학자들이 양자역학의 거친 물결에 쓸려가 버렸다. 몇몇 나이 든 물리학자들과 젊은 세대들만이 그 세찬 물결을 버티고 살아 남았다.


언젠가 엇후프트가 강연에서 이런 말을 했다. "난 내 이론이 영원히 맞는 이론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누군가 좀 더 나은 이론을 내놓을 겁니다" 지금까지 물리학은 그렇게 발전했다. 또 한번은 50년대에 다이슨이 "강상호작용은 앞으로 백년이 지나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지나친 비관주의도 금물이다. 우리 물리학자들이 누구냐. 지난 수백 년 동안 불굴의 투지를 보여주지 않았나? 1970년대 양자색소역학이 나오면서 비로소 강상호작용의 모습을 제대로 보게 되었다. 다이슨의 말은 틀렸다.


하지만 비섭동영역에서 양자색소역학을 이해하는 건 여전히 더디다. 한걸음씩 한걸음씩 나아가고 있지만, 쿼크가 왜 강입자 안에 갇혀 있는지 아직도 잘 모른다. 그러나 이 문제도 언젠가는 반드시, 반드시 해결될 것이다. 내가 들뜬 강입자의 구조에 매달려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무거운 중입자

중입자. 양성자처럼 쿼크가 세 개로 이루어진 입자를 중입자라고 부른다. 아니, 쿼크 다섯개로 이루어진 입자도 최근에 발견되었으니까, 중입자를 쿼크 세 개로 이루어진 입자로 정의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겠다. 핵자처럼 “대부분”이 쿼크 세 개로 이루어진 입자라고 정의해 두면 좀 안전하려나. 중입자. 영어로는 바리온(baryon)이라고 부르는데, 이 바리온의 어원은 그리스어, 바로스(baros)에서 왔다. 이 단어는 성경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에서 무거운 짐을 가리키는 단어와 같다. 그러니까, 무거운 입자라는 말이다. 양성자도 바리온이지만, 이 양성자보다 더 무거운 중간자도 존재하니까, 지금은 그 뜻보다는 그냥 이름으로 받아드리는 게 더 낫겠다.
이 중입자 중에서 가장 무거운 계열에 있는 건 아무래도 쿼크 중에서 두 번째로 무거운 쿼크인 바닥 쿼크가 들어가 있는 놈들일 거다. 참고로 제일 무거운 쿼크인 꼭대기 쿼크는 존재하는 시간이 너무 짧아 입자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이 바닥 쿼크 하나, 나머지는 가벼운 쿼크 두 개로 만들어진 바닥 중입자 중에서 기저를 이루고 있는 입자의 개수는 모두 15개다. 이 열 다섯 개의 입자 중에서 몇몇은 아주 최근에야 LHC에서 발견되었다. 열 다섯 개 중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은 것은 오메가-b다. 이 오메가-b를 찾는 건, 시간 문제다. 아마 발견된다면, 그 질량은 대략 6100 MeV 근처 일 것이다. 어떻게 아느냐고 물으신다면, 대답해 드리는 게 인지상정(포켓몬의 악당들 말투…)이지만, 그러면 말이 좀 길어질 것 같다.
하지만 이 입자들이 발견되어도 조금 문제가 있는데, 바닥 쿼크를 지니고 있는 입자들은 LHC에서나 발견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새로운 입자는 항상 두 그룹 아니면 더 많은 실험에서 발견해야지만, 확신할 수 있는데, 지금 지구에 존재하는 가속기(또는 충돌기) 중에서 이 정도로 무거운 입자를 찾을 수 있는 곳은 LHC 밖에 없다. 그게 많이 아쉽다. 중국에서 마음 먹고 LHC보다 더 큰 가속기를 만들겠다는 소문이 있으니까, 그 소문에 한번 이 아쉬운 마음을 기대 볼까나……

반전성이 깨진 파이온-핵자 결합상수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연구를 쉬운 말로 써 보는 것, 그것 참 쉽지 않다. 그래도 쉬운 말로 써보는 게 무척 중요하다는 걸 깨달은 건, 그래야만 지금 내가 무얼 하며 살고 있는지 좀 더 잘 알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Parity-violating pi-NN coupling constant from the flavor-conserving effective weak chiral Lagrangian”. 지금 내가 수정해야 하는 논문이다. 이 논문 제목, 뻔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이 말을 쉬운 말로 설명하려고 하니까 숨이 컥 막힌다. 그래서 번역을 해봤다. “향을 보존하는 유효 약 라그랑지안에서 반전성을 깨는 파이온과 핵자의 결합상수” 영어나 번역한 말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 유효 약 라그랑지안이 무슨 보존제도 아니고 향을 보존하다니, 이건 무슨 말이냐고 그럴 것 같기도 하고, “반전성을 깨는”은 또 뭔지 정말 깬다.

그래서 역시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쉬운 말로 적어보는 것, 이게 아주 중요하다는 게 몸서리칠 정도로 느껴진다. 먼저 “향을 보존한다”는 말부터 시작해야 되겠다. flavor라는 단어는 물리학에서 “맛깔”이라는 단어로 번역되어 있다. “맛깔스럽다”할 때 그 맛깔이다. 이 맛깔은 쿼크의 여섯 가지 종류를 아우르는 총칭 단어다. 그러니까 위, 아래, 기묘, 맵시, 바닥(때로는 beauty라고 하기도 하는데, 요즘은 바닥을 더 많이 쓰는 것 같다), 꼭대기, 이 여섯을 이르는 말이다. 쿼크와 짝을 이루는 렙톤 또는 경입자의 종류도 이 맛깔로 나타내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쿼크의 종류를 맛깔스럽게 나타내는 말이 바로 이 맛깔이다.

이 맛깔은 전자기상호작용이나 강상호작용에서는 변하지 않지만, 약상호작용에서는 대부분 이 맛깔이 변한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경우도 있는데, 그 경우를 말할 때 “맛깔이 보존되는”이라고 한다. “맛깔을 보존하는 유효 약 라그랑지안”에서 라그랑지안은 그럼 뭘까? 라그랑지안은 원래 역학에서 왔다. 이 라그랑지안을 역학에서 출발해서 설명하자면, 이야기가 옆길로 샐 수 있으니까 아주 짧막하게 이 라그랑지안을 표현하겠다. 예를 들어 전자가 전자를 만날 땐 인사를 한다. 그 인사하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다. 서로 빛을 보내 인사한다. 우리도 인사할 땐 대개 눈을 보며 눈빛을 보내듯이 전자도 빛을 보내 인사한다. 이 라그랑지안은 전자가 다른 전자에게 어떻게 빛을 보내 인사해야 하는지 “인사방법 매뉴얼”쯤으로 생각해두자. 이 라그랑지안 앞에 붙어 있는 “유효 약”에서 “약”은 약상호작용을 할 때 입자들의 인사법을 강조한 말이고, 유효는 격식 차린 인사가 아니라, 좀 편안한 인사라고 생각하면 별 무리 없을 듯 하다.

그럼 “반전성 깨는”을 보자. 반전성은 정말 중요하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이 반전성이라는 것이 보존되는 줄만 알고 있었다. 이 반전성은 오른손잡이들의 세상이나 왼손잡이들의 세상이 다를 이유가 없다는 것인데, 유독 약상호작용에서는 두 세상이 다르다. 하지만 실제 세상에서도 이 반전성은 좀 깨져 있다는 건 눈을 조금만 더 뜨면 잘 보인다. 사람의 심장은 대부분 왼쪽에 있다는 것, DNA의 나선형 구조도 반드시 한쪽 방향으로 감겨 있다는 것, 달팽이의 껍질도 주로 한쪽으로만 감아 올라가 있다는 것(맞나?)……

“파이온-핵자 결합상수”라는 말은 파이온과 핵자가 서로 얼마나 친한 지를 보여주는 세기다. 여기서 파이온도 설명하자면 한참을 설명하여야 하지만, 지금은 강입자들 중에서 가장 가벼운 입자 정도로만 정리해두자. 강입자는 쿼크로만 이루어진 입자를 말한다. 핵자는 다들 아시리라고 믿는다. 양성자와 중성자를 통칭하는 말이다. 따라서 “반전성 깨는 파이온-핵자 결합상수”라는 말은 “약상호작용 때문에 생기는 파이온과 핵자의 친밀도(?)”가 되겠다.

헤스와 콜회르스터

1912년 8월 7일 새벽 6시 12분, 지금은 체코의 영토인 아우시히에서, 헤스는 한 명의 기상학자와 기구를 조종할 비행사를 데리고 역사적인 비행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제법 높이 올라가기 위해서 열기구 대신에 기구 안에 수소를 잔뜩 집어 넣었다. 기구가 점점 높이 올라갈수록 한여름이었지만 바깥 공기는 점점 싸늘해졌다. 밖을 내다보자 저 너머로 독일 국경이 눈에 들어왔다. 아침에 햇살에 모습을 드러낸 오스트리아의 산악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바깥 온도는 영하 10도 이하로 몹시 추웠지만, 그는 경치를 감상할 틈도 없이 기구가 하늘 높이 올라가는 내내, 높이에 따라 대기 중에 있는 이온의 개수를 측정하여 기록으로 남겼다. 정확하게는 1 cc 대기 중에 단위 초 당 이온의 수를 쟀다. 200미터에서 500미터까지는 15.3, 500미터에서 1000미터 사이에서는 15.6, ……, 3000미터에서 4000미터 사이에서는 19.8, 4000미터에서 5000미터 사이에서는 34.4! 놀랍게도 기구가 높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검전기에서 검출되는 이온의 수는 급격하게 증가하였다. 헤스는 혹시나 있을지 모를 검전기의 오차를 생각해서 검전기를 두 개 가지고 올라갔다. 두 번째 검전기에서 측정된 이온의 수는 달랐지만, 증가하는 정도는 거의 같았다. 결국, 헤스가 알아낸 건, 고도가 높아질수록 대기 중에 있는 이온의 개수도 증가한다는 것이었다. 그가 5350 미터 상공에 도달했을 때는 오전 10시 45분이었다. 기구는 200킬로미터를 넘게 날아가 베를린에서 50 킬로미터 떨어진 피스코프라는 도시에 내렸다.

헤스는 1911년에 두 번, 1912년에 일곱 번, 1913년에 한 번, 모두 열 번을 기구를 타고 올라갔다. 이 중에 다섯 번은 밤에 하늘로 올라갔고, 그중 한번은 아침까지 하늘 위에 머물며 측정을 계속했다. 그리고 1912년 4월에는 개기일식이 있는 날에 기구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그는 태양에서 오는 방사선의 영향도 있는지 알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태양의 영향은 거의 없었다. 헤스는 1912년 기구를 타고 측정한 결과에서부터 대기를 이온화 시키는 방사선은 지구의 암석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저 높은 하늘, 지구 바깥에서 지구로 소나기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생각은 옳았다.

그러나 학자들이 처음부터 헤스의 생각을 믿었던 건 아니었다. 방사선이 지구 바깥에서부터 들어온다는 헤스의 제안은 그 당시로서는 급진적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은 헤스의 제안을 믿지 않았다. 그리고 모든 새로운 발견은 검증이 필요했다. 그 중에는 할레대학교에서 갓 박사를 받은 독일의 물리학자 베르너 콜회르스터가 있었다. 콜회르스터는 브라운슈바이크에 있는 한 회사의 도움을 받아, 거의 2년에 걸쳐 헤스가 사용했던 검전기보다 훨씬 더 정교한 검전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1913년, 헤스가 했던 것처럼 기구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 대기 중에 이온수를 측정하였다. 1914년 6월 28일에는 헤스가 올라간 것보다 훨씬 더 높이, 9300미터 상공까지 올라갔다. 콜회르스터가 측정한 결과는 놀라웠다. 9000 미터 상공에서 측정한 이온의 개수는 지상에서 잰 것보다 무려 40배나 더 많았다.

이 두 사람의 결과는 유럽, 미국, 소련, 일본에 있는 물리학자들에게 많은 반향을 일으켰지만, 헤스의 의견을 정설로 받아 드리기에는 아직 일렀다. 그리고 헤스의 말처럼 우주선이 지구 바깥에서 들어오는 방사선이라면, 그것이 감마선인지, 아니면 전하를 띤 입자인지 알아내야만 한다. 그리고 전하를 띤 입자라면, 음전하인지, 양전하인지도 따져봐야만 한다. 더구나 헤스와 콜회르스터의 발견에 오류가 있을 수도 있었다. 아직 많은 가능성이 남아있었다.

물리학에서 새로운 발견이 하나의 이론으로 자리잡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 헤스의 제안 대로 “헤스의 방사선”이 우주선이라는 이름으로 물리학 사전에 등록되기까지는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헤스가1936년에 앤더슨과 같이 노벨상을 받았으니까, 24년의 세월이 흘러서야 그의 발견이 제대로 인정 받은 셈이다. 이 우주선의 초기 연구는 오늘날 물리학을 전공한 사람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좀 더 나은 결과를 얻기 위해 검출기를 개발하고, 나중에 이야기하겠지만, 컴프턴은 오늘날 거대과학처럼 거대 실험 (정확히는 탐험) 그룹을 만들기도 했다. 그 연구그룹을 이끌고 위도에 따라서 우주선의 세기가 어떻게 달라지는가 연구하기 위해 전 대륙을 누비고 다녔다. 그 때는 빠른 비행기도 없었다. 주로 배를 타고 다녔다는 점을 떠올리면, 말 그대로 과학의 발견을 위해 개고생도 마다하지 않았던 셈이다.

우주선(Cosmic ray)

과학에서 놀라운 사실이 발견되는 건 때로는 우연일 수도 있고 때로는 필연일 수도 있다. 어느 경우든, 그 발견에는 과학자들의 엄청난 투혼이 배여 있다. 우주에서부터 엄청난 양의 방사선이 지구로 들어오고 있다는 걸 알아낸 것도 처음에는 우연이었다. 이 우연에는 17세기, 18세기를 거치면서 과학자들이 만들어낸 검전기의 역할이 무척 중요했다. 대기가 이온화되었다는 사실은 이 검전기로 알아냈지만, 무엇 때문에 대기가 이온화되었는지 알아내기 위해서는 좀 더 노력이 필요했다. 처음에 대기가 이온화되는 건 감마선이나 X-선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좀 더 정확하고 세밀한 관찰이 필요했다.
프랜시스 헤스는 오스트리아 그라츠 대학교 출신의 실험물리학자였다. 헤스는 1911년부터 기구에 검전기를 싣고 하늘로 올라가 이온화된 대기의 양을 측정하였다. 헤스가 발견한 것은 높이 올라갈수록 대전된 대기의 양이 점점 더 증가한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좀 더 정확한 데이터를 얻기 위해서는 좀 더 높이 올라가야 했다. 1912년 8월 7일 아우시히 시. 지금은 체코의 수도 프라하에서 북쪽으로 100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곳이지만, 그 때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속해 있던 곳이었다. 새벽 6시 32분, 헤스는 비행 기구를 운전할 비행사와 기상학자 한 명과 같이, 수소로 가득 채운 기구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이번에는 수소의 힘을 빌어 제법 높이 올라갔다. 도달한 높이는 최고 5300여미터. 기구가 점점 높이 올라갈 때마다 그는 좀 더 꼼꼼하게 높이와 대기의 이온화 정도를 자세히 측정하였다. 기구는 독일 국경을 넘어 200킬로미터를 넘게 날라간 뒤, 베를린에서 50여 킬로미터 떨어진 피스코프 시에 내렸다. 이 한 번의 실험으로 그는 정말 많은 걸 알아내었다.
헤스가 알아낸 것 중 가장 중요한 건, 대기가 이온화되는 것은 지구 암석에서 나오는 방사선 때문이 아니고 우주에서부터 날라오는 방사선 때문이라는 사실이었다. 더구나 그가 기구를 탄 날은 부분일식이 일어나던 때였다. 그가 이 날을 선택했던 이유는 이 방사선이 태양에서 오는지도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한번 기구를 타고 올라가면서 많은 걸 알아내기로 이미 작정했던 것이다. 그는 대기가 이온화 되는 데 태양의 영향은 거의 없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그 때가 1912년이었으니까 물리학자들은 방사선 종류로는 기껏해야 전자와 X-선, 양극선 정도만 알고 있었다.
헤스는 이 방사선이 태양에서 오는 것도 아니고, 지구의 암석에서 오는 것도 아니라면, 아마 태양계 바깥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추측했다. 하지만 이 헤스의 발견이 바로 학회에 인정을 받았던 것도 아니다. 헤스의 발견이 사실인지 검증이 필요했고, 왜 그런지 제대로 된 설명도 필요했다. 이 방사선이 전하가 감마선인지, 아니면 전하를 띠고 있는지, 전하를 띠고 있다면 음인지 양인지, 그리고 정말 태양계 바깥에서 오는 것인지, 알아내야 할 게 많았다. 1920년대가 넘어서야 헤스가 발견한 방사선에 “우주선”이라는 이름이 붙는다. 이 이름을 붙인 사람은 1900년대 초 미국 실험물리학자로는 가장 잘 알려진 로버트 밀리칸이다. 그리고 서서히 많은 물리학자들의 관심이 우주선으로 쏠리게 된다. 유럽 뿐만 아니라, 미국, 소련, 일본에 있는 물리학자들도 1920년대부터 우주선 연구에 힘쓰기 시작했다. 헤스는 1936년에 이 우주선에 대한 연구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이 우주선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좀 더 명확하게 밝혀내기 위해 아직도 많은 물리학자들이 연구하고 있다.
1935년, 일본 오사카대학교 조교수로 있던 유가와는 핵력을 매개하는 입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예언한다. 질량은 대략 100 MeV 정도. 그러니까 전자보다 대략 200배 정도 큰 입자가 있을 거라는 걸 예언하면서, 아마 우주선에서 발견할 수 있을 거라고 논문에 적었다. 이 유가와의 예언은 그 자체로 역사다. 그 전에 디랙이 반입자가 존재할 것이라는 예언을 한 적이 있고, 이 반입자도 우주선에서 발견되긴 했지만, 물리학에서 최초로 새로운 입자의 존재를 예측한 물리학자가 바로 유가와다. 그 이 후에 겔만이나, 와인버그, 글래쇼, 살람, 그리고 최근의 힉스와 엥글러트도 모두 새로운 입자들이 존재한다는 예측했지만, 최초는 유가와였다. 유가와는 이 입자가 어떻게 붕괴하는지도 미리 예측하였다. 단순히 입자의 질량만 예측하는 것만으로는 실험물리학자들에게 충분한 동기를 주지 못한다. 이 입자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붕괴를 어떻게 하는지도 말해주어야 실험물리학자들은 비로소 그 입자를 찾기 위해 달려 든다.
실험물리학자 앤더슨과 네더마이어는 우주선에서 유가와가 예측한 입자와 비슷한 입자를 발견하였다. 처음에는 그 입자에 메조트론, 또는 뮤-메존이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나중에 이 입자는 전자와 형제지간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리고 이름도 메조트론에서 뮤온으로 바뀐다. 하지만 이 입자는 유가와가 말했던 붕괴과정과는 좀 다르게 붕괴하였다. 그러니까 이 입자는 유가와가 예언했던 그 입자가 아니었다. 그가 예측한 입자는 2차세계대전이 끝난 후에야 발견되었다. 앤더슨과 오끼알리니, 이 두 명의 물리학자는 실험 팀을 꾸려 구름상자를 들고, 해발 2890미터의 산꼭대기 픽 뒤 미디(pic du midi)에 올라갔다. 거기서 비로소 훗날, 파이온이라고 알려지게 되는 입자를 발견하였다. 바로 이 입자가 유가와가 예측한 입자였다. 이 일로 유가와는 1949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바로 일본의 첫 노밸물리학상 수상자가 되었다.
물리학에서 새로운 사실이 발견될 때, 이 발견은 한 사람의 천재의 노력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헤스도 그랬고 유가와도 그랬다. 헤스가 실험을 하기 위해서는 좀 더 발전된 검전기가 중요했고, 유가와가 파이온을 예측하기 위해서는 페르미의 이론, 그러니까 초기 버전의 양자장론도 필요했다. 그리고 비처럼 쏟아지는 우주선 사이를 헤집고 다니던 실험 물리학자들이 반드시 필요했다.
한 두 명의 천재가 과학의 큰 줄기를 바꾼다는 과학 혁명. 그리고 혁명 사이에는 정상과학이 있다는 이론. 난 여전히 그 쿤의 이론에 선뜻 마음이 가질 않는다. 그 이론은 멋있고, 과학사를 조망하는 데 대단히 유용한 틀을 제공해 주지만, 물리학이 지금 모습을 갖추게 된 데에는 정말 많은 물리학자들의 피땀 어린 노력이 있었다. 그리고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소용 없어 보이는 사실을 발견하기 위해 때로는 목숨조차 바쳐야 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과학자들에 대한 편견

영화, 쉬리에서 맨 처음 살해당하는 사람은 핵물리학자다. 캡틴 아메리카 첫 편에서 캡틴 아메리카를 ‘튼튼하게’ 만든 과학자도 총 맞아 죽는다. 레드 스컬 밑에서 일하는 과학자는 스컬이 호통을 치면 꼼짝 못한다. 그리고 미국에서 만든 코미디물 <빅뱅>에 나오는 네 명의 과학자, 이 중 세명이 물리학자다. 전부 다 우스꽝스럽다. 이런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마다 마음이 불편해진다. 영화에서 과학자들이란 과학 외에는 아는 게 없는 nerd거나, 비밀 병기를 만드는 법을 좀 알고 있다고 힘없이 암살 당하거나, 보스 밑에서 꼼짝 없이 명령에 따라 살인 무기를 만드는 사람들로 그려진다. 그나마 좀 괜찮은 편에 속하는 과학자라면, 알프레드 히치코크 감독이 만든 오래된 영화, <찢어진 커튼(Torn curtain)>에 나오는 핵물리학자, 마이클 암스트롱일 것이다. 대개 영화 속에서 활약(?)하는 과학자들과 이 영화의 주인공, 암스트롱은 많이 다르다. 과학자가가 주인공이라는 것도 의외이고 거기에다 이 물리학자는 저명한 과학자이면서 동독에서 극비 기술을 빼 내오는 임무를 맡은 스파이다. 실제로 이론물리학자가 전쟁 중에 스파이 일을 한 적도 있기 때문에, 암스트롱을 물리학자이자 스파이로 설정해 놓은 게 현실과 마냥 동떨어진 건 아니다.
히치코크 감독이 이 영화를 만든 해가 1966년이라는 사실에 주목하면, 이 영화가 나올 당시의 시대 상황과 물리학자들의 위치를 조금은 가늠해 볼 수 있다. 냉전이 최고조에 달했던 때가 1960년대다. 영화 제목 자체가 이미 철의 장막(Iron curtain)을 암시한다. 1960년대 핵물리학자들은 원자폭탄(핵분열탄), 수소폭탄(핵융합탄)을 만드는 사람들로 알려져 있었다. 사실이 그것과는 다르다고 해도 한번 그렇게 알려지면, 사람들 뇌리에 핵물리학자는 원자폭탄을 만드는 사람들이라는 모습으로 굳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핵물리학이 1970년대 초까지 각광을 받았던 것도 핵폭탄 때문이었다는 걸 알면, 핵물리학자=원자폭탄 제조자들이라는 말을 들어도 그리 할 말은 없는 셈이다.
프리츠 하버, 그리고 에드워드 텔러. 프리츠 하버는 공기 중에 있는 질소에서 암모니아를 합성하는 데 성공해 비료를 만들어 내는 데 성공한 화학자이다. 동시에 1차 세계대전 때 전장의 군인들을 죽음으로 내몬 독가스를 만든 화학자이기도 했다. 그래서 노벨화학상을 받은 뛰어난 학자였지만, 프리츠 하버에게는 <독가스의 아버지>라는 오명이 늘 따라 다닌다. 아이러니는 프리츠 하버가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1933년에 정권을 잡은 나치의 핍박을 받아 당시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의 소장직을 그만 두어야 했고, 끝내는 영국으로 망명을 떠나야만 했다. 그리고 1935년, 바젤의 한 호텔에서 65세의 나이로 쓸쓸히 숨을 거둔다.
에드워드 텔러는 프리츠 하버와는 달리 95세까지 장수했고, 평생 동안 명예와 부를 누린 사람이다. 그에게는 <수소폭탄의 아버지>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 헝가리 출신의 이 유대계 이론물리학자는 하이젠베르크의 제자였다. 1937년에 이론 물리학자 가모브의 도움을 조지워싱턴 대학교의 교수로 가면서 2차세계대전 때 유럽을 흡사병처럼 휩쓸던 반유대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942년, 미국에서는 원자폭탄을 만들기 위한 비밀 프로젝트가 물밑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이 프로젝트는 “맨하탄 프로젝트”라고 불렸다. 버클리대학교의 이론물리학자 오펜하이머가 이 프로젝트의 총책임자였다. 그의 지도 아래 미국 내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은 직간접적으로 이 프로젝트에 참가했다. 에드워드 텔러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 전까지만 해도 에드워드 텔러는 단지 잘 알려진 이론물리학자일 뿐이었다. 엔리코 페르미를 비롯해서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이 핵분열을 이용하여 핵폭탄을 만들려고 애쓸 때, 그는 이미 이 때 핵융합을 이용한 폭탄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을 품었다. 이 텔러의 생각은 훗날 수소폭탄을 탄생시킨다.
맨하탄 프로젝트에서 만든 첫 번째 원자폭탄의 실험은 1945년 7월 16일에 뉴 멕시코의 사막에서 이루어졌다. 그 폭발력은 엄청났다. 맨하탄 프로젝트에 참가했던 물리학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이 원자폭탄의 가공할 위력에 놀랐고, 이 폭탄이 인간을 죽이는 데 사용되지 않기를 바랬다. 이 과학자들 중에서 레오 실라르드가 가장 충격을 받았다. 실라르드는 핵분열의 연쇄반응을 맨 먼저 생각했던 사람이고, 그 아이디어를 특허로 냈던 이론 물리학자였다.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원자폭탄을 만들어야 한다고 비밀리에 편지를 보냈던 사람이고, 아인슈타인을 설득해서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도록 설득했던 사람도 바로 실라르드였다. 그리고 그는 맨하탄 프로젝트를 가동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장본인이었다. 맨하탄 프로젝트에 참가했던 물리학자들 중 70명이 레오 실라르드가 작성한 탄원서에 서명을 했다. 하지만 이 탄원서는 트루만 대통령에게는 전달되지 못했다.
에드워드 텔러는 달랐다. 그는 그 탄원서에 서명을 하지 않았다. 그는 과학자란 정치적인 결정과는 상관 없이 가치중립적 태도를 취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은 실라르드에게 보낸 그의 편지에도 잘 나타나 있다. 오히려 이 폭탄이 많은 미군들을 살릴 수 있다고, 이 폭탄 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고, 편지에 썼다. 그 뿐만이 아니다. 1954년 맨하탄 프로젝트의 책임자였던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청문회에서 에드워드 텔러는 오펜하이머에게 불리한 증언을 했다. 이 텔러의 증언은 과학자들의 공분을 사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이날 그는 정치적으로 탄탄대로를 달리는 주춧돌을 놓은 셈이었다. 비록 동료 과학자들의 신망은 잃었지만, 군인들과 정치가들에겐 극진한 환대를 받았다. 미국이 수소폭탄을 개발할 때 선두에 서서 지휘한 사람도 텔러이고, 훗날 레이건 정부의 스타워즈 프로젝트 뒤에도 텔러가 있었다. 그 덕에 그는 미국 정부로부터 늘 후한 대접을 받았다.
이 에드워드 텔러와 대척점에 서 있는 사람은 소련의 안드레이 사하로프이다. 사하로프 또한 소련이 수소폭탄을 개발할 때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이론 물리학자였지만, 그 후 그의 행보는 텔러와 정반대였다. 수소폭탄의 공포를 가장 잘 알았던 사하로프는 반핵운동과 인권운동에 앞장 섰다. 하지만 소련에서 반핵 운동과 인권 운동을 한다는 것은 정부와 척을 지는 걸 의미했다. 소련에서 그의 삶은 정말 가시밭길을 걷는 것이었다. 1976년, 노벨평화상을 받았지만, 그는 거의 죽기 전까지 가택 연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가택 연금 중에도 그는 단식 투쟁을 하며 그의 정신을 지켜 나갔다. 고르바초프가 소련 서기장이 되고 나서야 그는 가택 연금에서 풀려 날 수 있었다.
영화나 티비에서는 과학자들이란 그저 어리숙하고, 과학 외에는 아는 것이 없고, 악당 보스가 명령하면 대들지 못하고 비밀 병기나 개발하는 사람으로 그려진다. 이런 스테레오 타입 과학자 모습 이면에는 “과학은 가치 중립적일 뿐이다”라는 명제가 숨어있다. 그러나 정말 과학은 가치 중립적일까? 유감스럽게도 20세기 역사에서 보여준 과학은 절대로 가치 중립적이지 않았다. 핵폭탄 개발에 참여했던 물리학자들 중에는 자신들이 한 일을 두고 치열하게 고민하며 반성한 사람들이 있었다. 영화나 티비에서 에드워드 텔러 같은 사람을 과학자들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고착시키는 것, 개인적으로는 유감이 많다. 과학에서 한 가치를 선택할 때, 그 선택을 하는 것은 개인의 몫이겠지만, 과학도 인류 문명의 한 가지로 이해한다면, 과학자들 또한 인간 편에 서야만 한다.